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전신마비의 원인을 찾기 위해, 조금 먼 과거 이야길 해야겠다. 그 첫 번째 단서는 내가 서너 살, 혹은 다섯 살쯤 되었을 무렵의 아주 먼 과거 이야기다.
아직 학교라는 곳에 가기 전이었던 그때, 내 곁에는 친형과 사촌 누나가 있었다. 형과는 다섯 살, 누나와는 네 살 터울이었다. 당시 누나가 초등학교 2학년 아니면 그보다 어렸던 것으로 기억하니 대략적으로 내 나이는 세살 ~ 다섯살 사이였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무얼 해도 즐거웠다. 워낙 밝고 무던한 성격이라 즐겁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그날 또한 모든 순간이 반짝거렸던 그런 나날 중 하루 중 예고 없이 찾아왔다.
우리는 엄마와 이모를 따라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커다란 둥구나무를 지나갔다. (내가 기억하는 둥그나무의 가장 최근 모습은 이십년정도 전인데, 번개를 맞아 그날의 위용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었지만, 적어도 그때 그날만큼은 하늘을 다 가릴 듯 웅장하고 거대했다.)
둥구나무를 지나 전파상 근처를 지날 때쯤 어렸던 나는 갑작스러운 요의를 느꼈다. 마침 길 건너편이 탁 트인 논밭이었기에, 나는 길만 건너 해결하고 오겠다고 엄마와 이모에게 호기롭게 말하고는 발을 뗐다. 그것이 그날 내 의식이 붙잡고 있는 마지막 장면이었다.
나중에 형님은 그때의 광경을 이렇게 회상했다. 사람이 그렇게 허공으로 높이 날아갈 수 있는지 몰랐다고….
운전자는 취해있었고, 갓길에 줄지어 서 있던 차들 사이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나를, 운전자는 미처 보지 못하고 그대로 쳐버린 것이다.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려온 그날의 이야기다. 근처 병원에서는 이미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고, 나는 대학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다고 한다. 형과 누나는 “차라리 내가 대신 치었어야 했다”며 병원 바닥에서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고 한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동네 가게 사장님이셨는데, “사람 하나를 망하게 하고 우리 아이가 잘될 리 없다”는 어른들의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가족은 다른 보상 없이 오직 치료비만 받았다고 한다.
기적 같은 일도 있었다. 차에 치여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내가 떨어진 곳은, 딱딱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공교롭게도 모래가 봉긋하게 쌓여있던 곳이었다. 형님은 내가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뉘어 있었던 것처럼, 상처 하나 없이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이 사고로 인하여 나의 두 다리 뼈는 모두 으스러졌고, 두세달간 두 다리에 모두 차가운 철심을 박아야 했다.
의식을 되찾은 후, 나는 한동안 실어증에 걸려 입을 닫았다. 1~2주간 부모님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갔었다고 한다. 그러다 말문이 트인 건 다름 아닌 바나나 덕분이었다. 당시엔 귀했던 과일이라고 하던데, 냉장고 위에 있던 작은 삼촌이 사오신 바나나를 가리키며 “바….나….나….” 하고 내뱉은 그 한마디가 약 2주간의 침묵을 깼다. 그때 한동안 말을 못한 게 한이 되어서일까, 마흔을 넘긴 지금까지도 나는 어디서나 ‘말이 참 많다’는 소리를 듣곤 한다.
철심을 빼고서는 허리 아래를 통째로 깁스로 감싸야 했는데, 아버지 말씀으로는 그 반신 깁스 환자가 드물어 의대생들이 견학까지 왔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내가 반신 깁스를 한 최연소 환자였다는 뒷 이야기도 있었다.
그 밖에도 작은 삼촌이 나무를 정성스레 깎아 내 몸에 딱 맞는 목발을 만들어주셨던 기억, 눕히면 눈을 스르르 감는 신기한 인형을 선물해주셨던 기억, 철심을 뺄때 울지 않아 어른들이 신기해하셨던 기억들이 있다. 그런 추억들을 먹으며 나는 서서히 회복했다. 양쪽 다리의 철심을 빼고 깁스를 풀었을 때, 나는 기적처럼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느 아이들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교통사고는 후유증이 무섭다고들 하는데, 내가 성장할때 그때 미처 치료하지 못한 상처가 영향을 준건 아닐까?
나에게 전신마비가 왔던 것은, 이 사고 때문이었을까?